「Idea Archive」 2019. 1. 24. 15:41

2019.0006.Archive : Speech Writer에게서 미래를 묻다.

2019.01.23. on Facebook

1.

백일장 2탄을 다 썼지만, 아직 제출하지 않았더랬다. 그냥 궁금해서, 과연 다른 급제자들은 뭘 어떻게 써서 배치했나 사실 궁금하기도 해서, 그냥 마침표(.)을 찍지 않은 채로 우리 연구원의 '민자도로관리센터 개소식' 에 참석했다.

우선 백일장 2탄의 경우에는 거의 흡사한 답안이 나와서 역시 다들 고만고만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뭐 이런저런 매체를 통해 접하는 이러한 형식의 글을 'Speaker' 본인이 쓰는 경우가 흔치 않기도 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로 드는 생각이 거기서는 우리와 같이 '백일장' 형태가 아니라, 전문적으로 글 쓰는 사람을 두고 있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도 되짚어보게 된다.

어찌되었건, 되도록이면 같은 단어를 반복하지 않고, 의미를 전달할 수 있으면서도 저러한 형태의 자리에서의 발언이 갖는 문법과 형식을 요소요소에 담으면서 글을 써내려 간다는 것은 어쩌면 좋은 훈련일지도 모른다. 물론 속 내용은 텅텅 빈 허상이라는 것이 안타까운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것 역시 언젠가는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조용한 믿음을 가져본다.

2.

나의 보스가 자주 쓰는 말이 있다.

"단어의 근친상간"

나는 이 말이 매우 현재 나타나고 있는 현상을 매우 잘 설명하고 있는 '워딩' 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단어를 생각해낸 확실한 것은 그 단어의 색채가 점점 옅어진다는 것이 그 한계를 여지없이 보여주기도 한다.

조용히 어딘가에서 열심히 자기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많은 선배, 후배, 동료분들이 본다면 욕을 할 수 있을만한 이야기지만, 따지고 놓고보면, 우리는 수 없이 많은 단어들을 늘어놓으며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수만가지를) 그것을 조합함으로써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만들고, 그것으로 '수행한 일'의 가지수를 늘여가곤 한다.

우리 같은 사람들을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은 늘상 우리에게 묻는다. "너희가 하는 일 어차피 본질(현장, 이론, 기술, 원리, .... 등)은 하나도 모르면서 아무거나 가져다 쓰는것 아니냐" 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꽤 심각한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어차피 논외에 있는 대상물의 반응에 그렇게 일희일비할 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서도, 분명 실제 일어나는 본질에 대한 생각은 아무래도 결여된 상태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만큼은 사실이니까.

어쩌면 글을 너무 못써서, 혹은 적확한 단어를 못 찾아내서, 우리가 하는 일을 멋들어지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정말 진짜로 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그것이 실체는, 그것의 효과는 무엇인지는 한번쯤 돌아보고 일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 먹먹함을, 어찌 극복할 수 없을것만 같아서.

3.

(2.의 보론) 1차원적인 분류, 2차원적인 분류, 3차원적인 분류 ... 우리가 무언가를 바라보는 관점의 축을 여러개 놓으면 놓을 수록 빈공간이 많이 발생하게 된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Orthogonal 하지는 않은 여러 축들 간의 상관관계를 밝히고, 그 축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 중 채워지지 않은 곳을 밝게 비추는 역할이 아닐까 싶다.

그래 말로는 쉽게 내뱉지만, 인지하기 어려운 그런 공간이 우리에게는 무한정 존재한다는 점에서 아직 나아가야할 곳이 많다.

그냥 자꾸만 이 일을 하는 이유를 찾아보려고 하다보니, 잡설을 계속 늘어뜨리게 된다. 무엇을 해야하는 걸까? 사춘기를 지나 오춘기가 온 건지.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 무엇을 욕망하는지 가끔 헷갈릴 때가 있다. 어쩌면 까먹은지도 모르겠고, 사실 알았는지 조차 불투명할 때가 있다.


「Idea Archive」 2019. 1. 24. 15:39

2019.0005.Archive : 국가R&D에 대한 단상

2019.01.16. on facebook

http://www.hankookilbo.com/News/Read/201901141320012912?did=PA&dtype=3&dtypecode=880&fbclid=IwAR3YeCngQjLQlxpj81Zy-qbxEi7dzq7qr9184WGo3LzEqB-ELkff1WcUhk8

1. 나 자신이 국가R&D 예산의 큰 수혜를 입었던 사람으로써, 아래 링크에 걸려 있는 한국일보 기사의 한문장 한문장에 공감이 갈 수 밖에 없다.

2. 기사에서 '출연연' 이라는 범주에 넣은 25개 기관은 아마도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산하의 출연연만을 카운트 한 것으로 판단되지만,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의 출연연구기관을 포함하면 (물론 이들 기관에서 국가 R&D 사업을 수행하는 경우는 그리 흔한경우는 아니라는 점까지는 인정한다.) 50개에 육박하는 출연연구기관이 있고, 이는 출연연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의 산학협력단, 공공기관 산하 연구원, 지방자치단체 산하 연구원까지로 수 없이 많은 연구주체들의 '생사'를 쥐고 있는 정책적 문제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겠다.

조금 더 디테일하게 생각해보면,

1. 우리나라 관료사회의 문제는 '우리가 해준다.' 라는 일종의 갑의식 또는 특권의식이라고 딱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데, 정부가 들어서면 일종의 시혜의 효과를 위해서 특정한 결과를 이끌어냈다고 말을 쓰고 싶어한다. (아마도 '정치'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라고 밖에 다른 해석이 어렵다.)

2. 결국 <우리가 했다.> 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단기간 또는 의미있는 기간 내에 '해냈다.' 라는 스토리를 쓸 수 있는 일들만 가득히 하거나, 실질적인 Player로서의 노력과 행동을 다 하지 않으면서 체리피킹만 하는 경우를 비일비재하게 발견하곤 한다.

3. 물론 사안 별로 개인 별로 앞선 문장의 단정하기 어려운 사례들이 많이 존재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사안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접근하고, 그 문제에서 정부가 맡아야할 역할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분은 드물다는 것이 대체적인 연구자들의 생각이라고 본다.

4. 이유는 간단하다. '그럴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렇다고 해서 그분들의 이익이 증가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더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 관료로써 소위 말하는 성공을 이루려면 결국 <좋은(권력이 있는) 부서에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영예롭게 은퇴하는 것> 이라는 명제에 부합하는 삶을 살려는 일종의 발버둥일테니까.

5. 때문에 기사에서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자신의 임기를 넘어서는 규모의 기간이 투입되어야하는 사안은 사실 관심을 가지려 들지도 않고, 연구의 단계나 현재의 수준에서 성취할 수 있는 결과물을 이해할 수 있는 처지들이 아닌 샘이다.

6. 정부는 스스로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하면서 이슈에 대한 스포트라이트를 원했던 정부의 '스타 공무원' 집단의 폐해를 보여주는 기사 중반부에 나오는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정부의 비교 인포그라프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론부터 말하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키워드들을 내세우고 있다.

7. 이해하기 좋게 일종의 테마를 잡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볼 수 있지만, 기초 기반을 다지는 역할은 모두 등한시하고 있다. 여전히 밖에서 다져놓은 방법론들을 일부 차용하여 나름대로의 로컬케이스를 만들어내는 정도가 R&D의 전부인 상황이라면 분명 우리의 연구개발 역량은 분명 글로벌 선도와는 거리가 먼 문제가 된다.

8. 인공지능이라는 용어가 생긴 이래로 2번의 큰 사이클을 돌았고, 세번째 중흥기를 맞는 시점에서 결국 컴퓨팅의 발전단계와 문제의 풀이 (솔루션) 를 위한 방법론 이라는 단순한 두 가지 영역에 대해서 우리는 명확하게 규정하지도 못하고 있다.

9. 연구라는 것의 단계를 이렇다 저렇다 나누기 어렵다고들 하지만, 사업화 할 수 있고 명쾌한 결과물들이 도출되는 연구만 수행하려고 든다면 미래 먹거리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 나올 수 밖에 없는 문제가 될 것이다.

10. 이러한 관점에서 관료조직의 운영과 National Research Fund의 운영,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운영에 대한 접근, 인식, 변화가 분명 필요한 시기가 되었고 연구와 소위 정책연구라고 불리는 컨설팅 또는 연구용역의 성격들에 대해서도 접근방식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11. 어떤 사안에 대해서 Player로써 뛸 수 있는 분들에게 의무와 책임을 주고 그만큼의 신분과 대우를 보장하는 것이 당연한 접근이 아닐까? 정책의 운영과 정책의 계획, 효과평가, 사후검증 등의 과정은 적어도 그래야만 한다고 본다.

처음으로 돌아가 "제가 정부라면요? 이 돈 써서 이런 연구 안하죠" 라는 명제로 돌아가보자.

1. 연구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문제의 근본을 탐구하고 해석하는 일을 하는 것이 사치라고 느껴진다는 점이다.

2. 그 다음으로는 결국 문제가 야기하고 있는 현상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의문에 문제 현상에 대한 공감대도 없다는 것이 문제다.

3. 아마도 그 다음으로는 겉으로 드러난 빙산의 일각을 보고 어떻게든 무언가 논리를 씌우고, 유행에 겉맞는 단어를 사용하여 하루하루를 버텨나간다는 자조적인 상황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4. 문제를 찾는 일을, 그 기저에 깔려 있는 기본원리를 찾는 일을 찾는 일은 단기간에 성과가 나오지 않으며, 찾는다고 할지라도 정확히 맞는다는 보장이 없는 일이기 때문에 아무나 쉽게 접근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정부가 대신 나서서 그러한 일을 하도록 "진흥" 하는 것이 연구사업을 지원하는 배경이 아니었던가?

"소망하건데, 보람찬 일을 하고 싶다."
늘상 나오는 이야기를 보고 아침 댓바람 부터 흥분해서 또 잉여로움을 뽐내다.

아마 이 긴 문장에 딱 한마디로 답변이 날아올 가능성이 크다.
"시키는 일이나 잘해."

이 문장이 지금 우리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Idea Archive」 2019. 1. 24. 15:38

2019.0004.Archive : 모빌리티, 빈 공간 채우기

2019.01.15. on Facebook


당장 다음달 부터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잘 모르겠으니까.
(문제는 회사에서 이 페이지에 접속이 안되는 것은 함정.)

"모빌리티" 분야가 왜 사업화가 안되는지에 대해서 강도 깊은 생각들을 나눠보고 싶은데 (이 분야 전공자들은 그럼 다 굶어죽으란 말인가?) 너무도 '견고한' 생각만 확인할 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여전히 interdisciplinary 적인 관점을 저 멀리의 어떤 것으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정작 좋아들하는 융합과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가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 부터 싫어하던 문/이과 논쟁이 나이들어서 까지 계속 보고 있게 될 줄이야. 그동안의 지식은 '분화' 함으로써 그 의미를 갖췄다면, 다시금 철학의 시대가 온것 같다. 우리가 철학자로 부르는 많은 그리스 시절의 학자들은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부터, 사회 전반을 가로지르는 통념을 가지고 노는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하다못해 공학자들 끼리도 각자 분야를 나누어 시시비비를 가리기를 좋아한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사회의 가장 밑바닥으로.. 지식의 가장 하위 계층으로 전락하고 있다. 차라리 무지한 것이 나을지도 모르는 그런 시대 말이다.


「Idea Archive」 2019. 1. 24. 15:36

2019.0003.Archive :

2019.01.13 on facebook

https://n.news.naver.com/article/003/0009006100?lfrom=facebook&fbclid=IwAR34aukYcJbDsZGje_h273SsFBu_Mi2vNvxM8LSOzO0wYRXN1LfFtGoHshc

왜 골목상권이 일부 소형매장들이 동네의 자랑이 되지 못하는지는 생각을 안하는지 모르겠다. 전통시장을 아케이드 올리는 사업을 백날한다고, 왜 집근처 전통시장이 번영하지 않고 경기도 교외의 대형쇼핑파크가 번성하는지 모르는건가 순수한건가?

🤷‍♂️🤷‍♀️

언제까지 하향평준화에만 포커스를 둘것인지? 
고객의 니즈를 찾는것 맞추는 것은 공급자의ㅜ영원한 숙제

「Idea Archive」 2019. 1. 24. 15:34

2019.0002.Archive : 왜 우리는 더디냐고?

2019.01.10


모빌리티 문제도, 금융결제의 문제도 우리모두가 불편하다고 인정하는 것을 개선할 의지가 없다는 것에서 부터 문제가 출발한다.


서비스 당사자들이 "어디한번 나를 이해시켜봐"의 자세를 견지하는 한 어떠한 기술적인 패러다임이 다가와도 그곳으로의 진보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정부 탓만한다고 뭐가 바뀔까?


그렇다면 그 당사자가 아닌 다른 당사자가 그에 합당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정도가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그냥 남들이 하고 있으니까, 그 길을 가겠다는 접근 보다는 훨씬 힘있게 추진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규제의 혁신' 이야기를 하곤 한다.


이해의 차이를 조정하는 것, 정치의 시작이자 끝 아닌가?

「Idea Archive」 2019. 1. 24. 15:32

2019.0001.Archive : 은행파업에 즈음하여

2019.01.08.


은행 파업에 즈음하여..


내가 처음으로 '자의'에 의해서 계좌를 개설하고 지금까지 거래를 이어오고 있는 어느 은행의 파업을 바라보며 ...


친한 벗과 이웃의 아버님이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곳이고,

그들 역시 그곳에서 삶을 영위했고, 마지막을 향하고 있거나, 그 다음의 삶을 살아가고 계신다. 또 어쩌면 그와 비슷한 직업을 가진 많은 잊혀진 지인들이 더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매일 '미래산업' 어쩌구 하면서 소설을 쓰는 일이 나의 일인지라. 이번 은행 파업의 본질을 살펴보면 과연 은행업에서 그 많은 인원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 동안도 조금씩 이행해오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대다수의 창구업무들은 앱과 ATM에서 다 처리가 가능하다. '대면업무' 라고 표현하고 '비대면업무' 라고 표현하는 업무들이 사실은 그다지 구분의 필요가 없어지고 있는 시대로 우리는 점차 이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여신을 위한 심사 역시도 '사람'이 개입하는 것보다 지표상으로 훨씬 공정한 심사가 가능할지도 모르고, Profitability를 측정하는데 있어서 사람의 직관보다 어쩌면 뛰어날지도 모른다.


왜 은행업에서 그렇다면 사람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조금 더 Naive하게 생각해볼 시점이 된 듯하다. 나의 업이 일종의 Consulting에 가까운 업이라고 (도저히 부끄러워서 Research 라고는 못하겠다.) 생각해본다면, 그 역시 왜 굳이 '사람'이 해야하는가에 대해서 긴 논쟁을 벌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여전히 사람의 직관이 쓰여야할 부분, 그 알고리즘화 할 수 없는 직관이 필요한 부분을 찾아내는 것이 결국 '생존'의 문제로 다가온 샘이다.


그렇다면 본질적으로 사람이 갖는 비교우위는 어디에 있으며, 그 어느쪽에도 우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그 다음 선택지는 무엇일까? 그리고 사람이 우위에선 자리로의 이행이 되지 않는다면 과연 남는 이는 어디서 무얼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


다시 돌아와서 다시 파업문제로 되돌아가보자.

그렇다면 "그만한 가치"를 누가 어떻게 창출해내나? 어찌보면 가만히 앉아서 돈버는 것이 은행업이라고 누군가 그랬다. (물론 가만히 앉아서 돈 벌기 위해서 발바닥 빠지게 뛰어다니는 누군가가 있었고, 그들이 있었기에 금융업이 지금 현재에 이르렀겠지. 어떤 관점에서는 전혀 만들어내는 서비스 또는 재화가 없는 산업이라고 단정할 수도 있겠으나, '금융서비스' 라는 것을 분명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고, 단지 그 가치가 얼마나 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만이 남을 뿐이다.) 사실 은행에 가서 만나는 사람 대부분은 '친절하다.' 아니 정확히 만나면 아직 '친절한 분들' 만 만나기 위해서 애를 썼기 때문이다.


친절한 분들이기 때문에 감정적인 동요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과연 친절한 그 분들이 없고 기계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지는 조금 생각해볼만한 문제이다. 사실 그 친절함은 '내색하지는 않지만' 불편한 친절함이거든. 인간적으로 그 자리까지 (불편한 친절함을 만나게 되는 자리까지) 가게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과연 '지금 제공되고 있는 금융서비스' 뿐일까?


냉랭한 아침에 커피한잔 마시며, 잡글 배설